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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위(本位)의 1%, 문명사의 중심이동
작성자 山林
작성일 2011-11-14 (월) 11:09
   
본위(本位)의 1%, 문명사의 중심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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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위(本位)의 1%, 문명사의 중심이동

 

1대 99의 사회, 삶이 각박해지고 고달파진다. 1%는 자기를 지키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힘겨워 하고 99%는 당장 먹고 살기에 허급지급 한다, 너나 할 것이 숨가빠 한다,

1대99의 양극화는 간단히 시정될 문제는 아니다, 이게 어느 날 갑자기 50대50이 되고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물론 현재의 1%가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99%의 저항을 받고 있고 그 저항이 행동주의로 표출되고 있다. 현재의 1%가 미래적 중심으로 자리할 수 있는 1%가 아니고 그래서 미래적 중심의 1%가 새로이 형성될 때 까지 행동주의는 소용돌이 치는 진화의 과정을 겪을 것이다,

1대99, 중심과 주변의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해진다, 인류사가 다음으로 전이해갈 때도 역시 새로운 1%의 문제다. 사회성과 생산성, 도덕성을 갖춘 새로운 1%의 등장과 함께 중심이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본위(本位)의 1%, 이것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의 문제인데, 화폐제도에서도 금본위, 은본위라고 하듯이 사회구성에서도 사회적 본위의 형성이라는 문제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본위의 1%가 등장하면서 중심 - 주변관계를 새롭게 형성하면서 사회역사적 진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이것을 일단 체계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게 숙제다, 상당기간 숙제가 될 것이다,

●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문명사로 전이시켜 낼만한 싹이 보이지 않는다. 본위의 1%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점이 우려되는 바다, 지금의 1%에도 싹이 없고 99%에서도 싹이 없다, 상대적 사회성과 도덕성, 생산성으로서는 또 다른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만 반복될 뿐 새로운 사회구성의 건강한 본위(本位)를 기약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정직한 이야기일 것이다.

지구촌 어디에서도 변화를 강조하지만 실은 변화를 거부한다. 자연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지만 인간은 변화를 거부한다, 어떻게 해서든 기존의 정치경제, 사회적 중력장을 고집하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 변화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고집, 고집할 수 없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이미 자연 환경적인 변화 속도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서 가속도가 붙었다. 기상이변은 이변이 아니라 일상화되고 있다, 최근의 지진, 홍수, 사막화는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이제는 그렇게 가속도가 붙은 자연 환경에 인간이 어떻게 따라잡으면서 적응을 하는가 하는 문제지 인간이 자연환경의 변화를 조정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세계사적 경제위기도 국제기구든 국가 연합전선이든 이것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 없다. 그것이 냉정한 진단일 것이다.

이런 자연지리적 변화, 사회경제적 변화들은 소위 근대 지성에 의해서 통제가 불가능하다. 근대 지성이 조종 내지는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는 인간이 적응하는 일만 남았다. 이제는 인간이 적응하는 문제가 남았고, 그 적응이라는 것도 이전의 자연주의적 진화관. 다윈류의 적자생존. 이런 형태의 소박한 진화론 단계는 넘어섰다. 그런 점에서 어디를 봐도 지금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그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가설적인 이야기지만,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할 본위의 1%에 대해서 추론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첫째, 생산성문제다, 생존을 담지할 수 있는 미래적 생산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과 같은 투기적 생산성, 투자효율성과 같은 생산성이 아니다,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생산성, 기업조직의 이윤과 동일시하는 생산성이 아니다, 타자의 이익을 가로채는 약탈적 생산성, 타자를 파괴하는 생산성은 지속불가능한 것이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생산성, 잉여의 생산성은 또 다른 재앙이 된다, 결국 미래적 생산성은, 자연과 인간과 사회, 이것을 동일지평에 놓는 체계화(socio-connectome)의 관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생산성이다. 이것이 비약적 생산성일 것인데, 그 생산성을 축으로(본위로 하여) 역사는 진화해 갈 것이다, (지금의 1%가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탐욕의 1%로 비난받는 것은, 자기생산성 이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적 인격적 본위의 문제다, 달리 말하면 99%의 저항에서 자유로운 1%일 수 있는가? 그만한 도덕성과 사회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성, 도덕성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말하는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사회의 도덕적 구심, 본위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 구심이 등장할 때 까지 행동주의의 시행착오는 계속될 것이다,

셋째, 새로운 사회의 구성이란 것, 이것은 현대사회의 수정이나 그 변통 연장선상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사회성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안형(安形)을 찾을 수 밖에 없는데, 가령 국가적 기강의 해이, 사회적 기강과 도덕적 해이라는 것들은 만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1대99의 양극화로 해체되어 가는 양상에 주목한다면, 현실적인 인간이 도덕성과 사회성이 감당할 수 있는 사회구성 - 체계화의 수준이란 것은 어떤 수준일까? 어떤 수준에서 안형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씨족공동체 수준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지연적 혈연적 씨족 공동체는 아니다, 새로운 생산을 축으로 하는, 생산성 중심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물론 씨족공동체의 가설은 지금으로서는 비약이 있는 이야기일 것이지만, 신자유주의 중력장의 해체와 맞물리는 행동주의의 전개양상을 주목하면서 구체적인 논의가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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